축구시즌은 축구 시즌인 것 같습니다. 관심없다 관심없다 하면서도 결국 경기를 보면서 주먹쥐는 제 꼴을 보면 역시나 축덕의 포스는 어디가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 수원빠들은 수원 근처의 어디 호프를 빌려서 수원 유니폼 입고 본다는데.. (아마 그랑쪽 모임들이겠죠? 저와는 안타깝지만 해당사항이..ㅠ) 저는 그냥 조용히 축덕 인증 찍으신 어머니와 21인지 브라운관 티비로 축구를 봤습니다. 저희집에서는 언제나 객원해설로 제가 나서는데;;수원을 자주 가면서 부터 어머니도 이정수, 염기훈 선수 (울산 선수로 알고 계셨지만) 등등 일반적인 K리그 수준의 지식은 알고 계신 관계로;;; 이제는 해설이라기 보다는 갤에서 떠드는 수준으로 축구를 봤습니다;;; 참 몇년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아들의 축덕라이프 10년이니깐 어머니가 변화시는군요;;;
본론 : 인천 시절부터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스토퍼의 한계가...
05년의 인천은 정말 대단했던 시즌이었습니다. 이근호, 최효진, 이정수 와 같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당시에 공격과 수비에 포진을 하고 있었고, 엘리치와 라돈치치라는 수준급 용병들이 즐비했었습니다. 결국 통합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을 했지만 사기유닛 이천수에게 캐발리면서;;; 결국 시민구단 첫 우승의 꿈은 다음으로 미루게 됐습니다. 1
그러던 인천의 중간기에 북패에서 영입된 이정수 선수는 참 신선한 선수였습니다. 지금도 짦은 머리지만 당시에도 빡빡 머리를 고수하던 이 수비수는 처음 인천으로 이적하던 당시만해도...수비수로 전업한지 얼마 안되는 선수 였습니다. 당시에 제가 일때문에 인천 구단에 자주 가는 편이었고 2군에서 훈련을 하던 이정수와 라돈에 대해서 당시 인천의 박이천 감독님게 여쭤보자...
발이 빠르고 체격이 좋아서 스토퍼로 제격이다. 마니치를 꽁꽁 묵더라!
라는 답변을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람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마니치는 05년까지는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전한 기량이었습니다. 빠른 발이라면 어디가도 죽지 않았던 마니치였던 만큼...당시에 인천에서는 10분용 마니치 타임을 만들었을 정도였으니까..(제 생각으로는 마지막 전성기 였을듯) 그런 마니치를 잡아내던 이정수의 대인 마크와 수비능력을 어느정도 인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비수로서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일단 이정수의 당시 포지션은 오른쪽 스토퍼로 경기에 출장을 했었습니다. 수비의 라인을 조율하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임주장 임중용 선수의 조율을 받아서 움직이는 수준이었으며 공중볼과 대인마크의 경험을 쌓아가던 선수였습니다. 사실 인천이 당시에 잘나가는 구단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대형구단이었던 북패에서 공격수로도,,, 수비수로도 주전 경쟁에서 밀리면서 단단한 각오로 넘어왔던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업해서 성공하게 한 수원
공격수에서 수비수로의 전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K리그 전체에서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업을 하고도 국가대표에 들어간 경우는 2000년 이후에는 딱 3명이 존재합니다. 최진철, 왕정현 그리고 이정수 입니다. 아시겠지만 왕정현 선수는 수비수로 한번 공격수로 한번 코엘류 호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국대의 고정 맴버로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최진철은 프로에 진출한 다음에는 거의 바로 수비수로 전업한 경우라서 프로생활을 수비수로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정수는 최소한 안양시절동안에는 공격수로 2군을 누볐으니 전업이 늦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길을 정말 독한 각오로 수비수로 전업을 한 이정수 선수지만 인천에서의 성공적인 시즌은 그에게 수원으로의 이적이라는 기회를 열어줬습니다. 그리고 2006년 수원으로 이적을 한 첫해부터 혹독한 주전 경쟁 속에서 고질적인 부상과 씨름을 하면서 1.5군 생활을 했습니다.
중앙 수비수라는 포지션을 부여받았던 이정수 선수지만 4백의 수비수로서 뛰기에는 중앙 수비 커버, 공격 전개능력등 절대적인 센터백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전업한뒤 처음으로 4백을 쓰는 팀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한 선수라도 그 전술을 몸에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정수 선수에게는 행운이 있었던 것이 이정수가 주전 경쟁을 했던 선수들이 이정수 선수에게는 피가되고 살이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박건하 현 수원 유소년 감독님과 마토 네랴클라크 (현 오미야) 선수였습니다. 이정수 선수와 정확하게 포지션이 겹치는 이 선수들은 한가지씩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박건하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에 체격적 조건과 스피드를 활용해서 대인마크에 강점을 보여주던 하던 이정수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과는 대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공격수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상대의 위치를 차단하고 수비라인을 조정하던 3백의 리베로. 그리고 4백의 중앙 수비수 역할이었습니다. 어쩌면 공격수로서의 본인의 경험을 잘 살리는 방법을 완벽하게 살리지 못하던 이정수 선수는 이런 박건하 선수와의 주전 경쟁 과정이 큰 약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엄청난 선수와의 주전 경쟁은 결과적으로 이정수 선수를 유틸리티 수비수로 성장 시켰습니다. 08년 오랜 유리몸 생활을 털고 처음으로 풀시즌을 치르던 이정수 선수의 첫 선발 포지션은 왼쪽 윙백이었습니다. 전문 윙백인 양상민 선수가 수원의 스쿼드에 존재했지만 차붐은 3백과 4백의 유기적인 조화를 위해서 이정수 선수를 사이드에 기용을 했고, 그동안 절치 부심하던 이정수 선수의 진가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토와의 호흡은 완벽했습니다. 마토가 공격으로 올라가면 이정수 선수가 센터백을 봤고, 보통 때는 과감한 공격 가담으로 골도 많이 넣었습니다. 심지어 주장 송종국 선수가 카드나 부상으로 빠지면 이정수 선수가 오른쪽 윙백을 보고 양상민 선수가 기용되는 파격도 보여줬습니다. 송종국/마토 쉬프트 라고 까지 불리던 08년 수원의 절대방패에 이정수 선수는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마토와의 경쟁이 그를 성장시켰으며 또다른 장점까지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 것 입니다.
이제는 타팀의 선수지만..
이제 이정수 선수는 타 팀의 선수입니다. 아챔에서는 언젠가 만날 것 같은..(그러기에는 교토가 약팀인가 가시마가 이번에 퐝에게 발려서 탈락했지만) 선수입니다. 너무나 위협적인 골 넣는 수비수로 성장한 이정수 선수가 이제는 마토 만큼이나 무섭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20대 중반에 그만한 성장을 이뤄냈고 이제는 수비수로서 전성기라고 일컬어지는 30대 초반...그리고 더이상 부상에 신음하지도 않는 이정수 선수...
어제 월드컵 첫 골과 함께 이제는 수원팬 뿐만아니라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것을 보면서 그의 그동안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수원의 주전 경쟁이;; 정말 무서운 것을 해냈구나...라는 것을 한번 생각을 하며 (교토팬이 이 글을 읽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수원팬으로서 우쭐한 기분도 한번 또 느껴봅니다...
이정수 파이팅.....다시 수원으로 컴백해라!!
- 당시에는 2군에 있었으므로 출전 기회는 없었습니다. [본문으로]